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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시엠립 게스트하우스 - ‘정치 풍운아’ 노로돔 시하누크 전 국왕 일대기 ❸

by camsomnang 2012. 1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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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주와 가택연금과 국왕 재취임·양위

 

1975년 9월 시하누크는 부인인 모니니엇과 함께 귀국했다. 국가수반으로 임명됐음에도 꼭두각시로 전락한 시하누크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크메르루주의 요청에 유엔총회에 참석하여 미국을 맹비난하는 등 체제 선전에 동원됐다.

1976년 4월 국가수반에서 시하누크가 키우 삼판으로 교체되면서 거의 3년간 왕궁에 유폐됐다.

1977년 크메르루즈가 베트남을 간헐적으로 공격하면서 베트남과 크메르루주 간의 긴장감이 고조됐다.

1978년 1월 크메르루주는 통일 베트남과 단교했다. 베트남은 크메르루주 내부에서 진행된 친베트남·친소 세력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피해 베트남으로 도주한 현 총리 훈센(1977년 6월 도주), 현 국회의장 헹 삼린, 현 상원의장 찌어 심 등이 주도하여 만든 저항군과 함께 캄보디아 침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2월 25일 베트남은 반크메르루주 저항군과 함께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1979년 1월 2일 시하누크는 모니니엇 왕비와 두 자녀(시하모니, 나린드라퐁)와 함께 중국이 보낸 특별기를 타고 출국했다. 시하모니는 아버지와 함께 귀국하지 않고 평양에 머물렀으나 크메르루주가 아버지의 서명을 도용하여 만든 편지를 받고 귀국하여 함께 유폐됐다. 1월 7일 프놈펜이 점령되면서 크메르루즈는 태국 접경 지역으로 쫓겨났다. 1월 10일 헹 삼린을 주석으로 하는 친베트남계 정권인 캄푸치아인민공화국(일명 헹 삼린 정권)이 만들어졌다. 해외로 도주한 시하누크는 크메르루주의 입장을 대변했다. 2월 크메르루주를 후원했던 중국은 응징하는 차원에서 베트남을 공격했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베트남군에 참패했다.

2차 망명

1981년 무장 저항 군사조직인 훈신펙을 만들었다.

1982년 헹 삼린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훈신펙과 순산의 KPNLF 그리고 크메르루주를 함께 묶은 민주캄푸치아연합정부(CGDK)의 수반이 됐다. 시하누크의 외교적 노력으로 CGDK가 유엔에서 캄보디아를 대표하면서 미국 등 서방국가와 태국으로부터 (군사)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당시 헹 삼린 정권은 전 국토의 80%, CGDK는 20%를 장악하고 있었다. 헹 삼린 정권은 베트남과 소련을 제외하고 국제적으로 경제봉쇄를 당하면서 고립됐다.

1985년 훈센이 헹 삼린 정권의 총리로 임명되면서 실력자로 부상했다.

1985년 4월 베트남의 후원국이었던 소련 공산당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시장경제로의 이행 등을 골자로 한 페레스트로이카를 선언하고 대베트남 지원을 단계적으로 축소한다고 발표했다.

1986년 베트남도 도이 머이(개혁)정책을 발표했다. 장기간의 캄보디아 내전 개입으로 입은 손실이 너무 크다는 공감대가 베트남 지도층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은 캄보디아 주둔에 연간 예산의 1/3을 지출했다.) 냉전이 서서히 해빙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사진) 훈센을 만난 시하누크

1987년 5월 시하누크는 플레이보이지와 인터뷰를 가져 논란이 됐다. 12월 시하누크는 훈센 총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프랑스에서 훈센을 만났다. 훈센이 만남을 요청한 배경에는 궁극적으로 베트남군이 철수하면 CGDK과 힘의 균형이 깨질 것이라는 현실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당시 서방 세계는 베트남이 철군하면 변방에 남아 저항하고 있는 크메르루즈가 다시 군사적 우위를 점할 것으로 점쳤다. (시하누크를 만날 당시 35세에 불과한 훈센은 아버지인 시하누크의 보좌관 자격으로 참석한 라나리드에 대해 우월의식을 갖게 됐다. 이 같은 훈센의 우월의식은 1993년 치러진 총선 결과에 따라 라나리드가 제1총리, 자신이 제2총리를 맡게 되면서 파국을 예고했다.)

1989년 9월 캄보디아에 주둔하고 있던 베트남군의 단계적 철군을 마무리했다. (침공에서 철군까지 캄보디아에 얼마나 많은 베트남군이 주둔했는지는 정확히 집계되어 발표된 적이 없다. 최대 10만명으로 추정되며 이 기간 1만5천명이 전사하고 3만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국왕 재취임

(사진) 1991년 시하누크의 귀국

1989년 캄보디아인민공화국은 국호를 캄보디아국(State of Cambodia 1989-1993)으로 바꾸고 사유재산 인정, 민영화 추진 등 탈 공산주의를 추진했다.

1991년 6월 4개 정파(시하누크, 훈센, 손산, 크메르루주)가 참여하는 범정파 통치기구인 최고민족평의회(SNC)가 구성됐다. SNC는 훈센파 6명 시하누크․폴폿·손산 각각 2명, 총 12명으로 구성됐으며 의장으로는 시하누크가 추대되고 부의장은 훈센이 맡았다.10월 23일 4개 정파는 프랑스 파리에서 각 정파 무장해제, SNC 활성화, 유엔 평화유지군 파견, 유엔잠정통치기구(UNTAC)의 감시하에 총선실시 등을 골자로 한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했다. 11월 14일 13년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시하누크는 북한 경호원들의 경호를 받으며 귀국했다. 북한 외교관들은 프놈펜 독립기념탑 인근에 있는 시하누크 소유의 저택을 공관으로 삼았다.

1992년 파리평화협정에 따라 유엔잠정통치기구(UNTAC)가 평화유지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5월22일 크메르루주가 불참했음에도 총선은 7일간 평화롭게 치러졌다. 첫 총선에서 무장조직에서 정당으로 탈바꿈한 훈신펙이 58석으로 1당이 됐고, 훈센의 인민당은 51석, 손산이 이끄는 불교자유당은 10석을 얻어, 훈신펙당과 인민당은 연정을 하기로 하고 라나리드가 제1총리, 훈센 총리가 제2총리에 취임했다.

1993년 9월24일 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제헌 헌법 공포하고 국왕 겸 종신 국가수반에 취임했다.(계속)

1993년 12월 임파선암이 발견되어 중국에서 치료를 받았다. (2005년 재발됐으며, 2008년 12월에는 전립선암이 발견됐다. 시하누크는 죽을 때까지 중국을 오가며 당뇨와 고혈압 등의 치료와 검사를 받았다.

1997년 7월 라나리드와 훈센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훈센 휘하의 군대가 라나리드 군대를 공격하는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다. 라나리드는 해외에 도주했다.

1998년 3월 시하누크의 중재로 징역 30년형을 선고받은 라나리드 왕자가 귀국했다. 7월 2차 총선에서 인민당 64석, 훈신펙당 43석, 불교자유민주당의 후신인 삼랑시당이 15석을 획득했다. 단독 정부 수립요건인 2/3을 넘은 정당이 없어 두 달 동안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다가 시하누크가 퇴임하겠다고 경고하면서 인민당과 훈신펙당은 다시 연정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훈센이 단독총리로 라나리드는 국회의장이 됐다.

1999년 2월2일 삼랑시당 삼랑시 대표는 시하누크가 모니니엇이나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넘길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2년 7월 시하누크의 장남인 라나리드 왕자와 시리웃 왕자(시하누크의 이복동생)는 왕위를 잇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03년 3월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한다는 비난이 제기되자 시하누크는 퇴위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7월 3차 총선에서 인민당 73석, 훈신펙당 26석, 삼랑시당 24석으로 왕당파인 훈신펙당의 인기는 선거를 거듭할수록 추락하고 있음이 증명됐다. 이때도 어느 정당도 단독 정부를 수립할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연정이 요구됐으나 라나리드와 훈센 간의 감정 싸움으로 연정은 지체됐다.

국왕 양위

(사진) 시하모니 국왕 대관식

2003년 11월 시하누크는 자신이 갑작스럽게 죽으면 국왕선출위원회(CC)는 라나리드 왕자와 시하모니 왕자파로 갈릴 것이라고 전망하고 후임 국왕이 결정되기까지 모니니엇 왕비가 섭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2004년 1월 정부 구성이 늦어지는 등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시하누크는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돌연 출국했다. 2월 베이징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동성연애자의 결혼식을 TV로 보고서는 캄보디아가 1993년 민주주의 국가로 전환됐기 때문에 동성애자 부부도 결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발표하여 화제가 됐다.5월 인민당과 훈신펙당 고위 당직자를 평양으로 불러 연정을 촉구했다. 7월 6일 평양에서 퇴위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텝봉 종정이 평양으로 가서 만류했다. 7월 15일 인민당과 훈신펙당간의 연정이 구성했다. 10월 10일 훈센 총리는 시하누크가 퇴위를 번복하지 않는다면 시하모니가 적임자라고 발표했다. 10월 6일 시하누크는 퇴위를 표명하고 국왕선출위원회 구성을 요청했다. 10월 14일 국왕선출위원회는 만장일치로 시하모니를 차기 국왕으로 선출했다. 10월 20일 국회는 시하누크 전 국왕에게 연 540만달러의 연금을 자급하는 안을 통과시켰다. 10월 29일 시하모니 국왕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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